남구 명예기자 김순점

그 옛날 포경산업이 합법이었을 때는 호황이었던 장생포.
어린 시절 어렴풋한 기억 속에는 지금의 화장지 트럭처럼 머릿수건을 쓰고 똬리에 양동이나 함지를 인 아줌마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외던 구성진 소리가 떠오른다.
“고래고기~ 사이소~~~”
어쩌면 검은 가죽같이 보이던 맨들맨들한 검은 껍질을 두르고 막 기름기가 배어나는 비곗살에 붙은 붉으스레한 살점을 얇게 저며 접시에 올려놓던 고래고기.
같이 놀던 친구들끼리는 이렇게도 읊으며 놀았었다.
“맛 좋은 고래고기~ 십 원에 열 개~”
그 추억의 끈을 잡고 고래가 바로 생활이었던 장생포 옛길을 걸으러 가본다.

장생포 옛길이란 글자체도 옛스러워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위치 : 장생포 고래로 179-2

장생 옛길은 소쿠리에 물건을 이고 다니며 판다고 해서 속칭 반티, 또는 방디 할매들이 고래고기를 머리에 이고 울산 장으로 갈수 있는 길이었다.
선장과 포수가 살던 마을의 역사와 장생포항의 생명수였던 우짠샘이 있는 장생 옛길은 그 시대 소통의 길이자 애환 그리고 추억을 새기던 길이다.

장생포 신위당은 1900년대 초로 추정되는 시기에 장생포 주민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1938년 9월에 현재의 건물로 재건하였는데 내부에 마을의 수호신으로 추앙받는 노부부 세 쌍의 도상이 안치되어 있다.
인물상 뒤에 승천하는 용의 그림으로 보아 이 신위는 동해의 용신과 관련된 것으로 판단되며 어업을 주업으로 하는 장생포 마을의 수호신으로 짐작된다.

남구 지명사에 의하면 모시는 신은 골메기 또는 보재할아버지로 마을을 수호한다고 믿고 있다.

장생포에는 3개의 우물 중 윗마을에 있다고 하여 우짠샘으로 불리는 샘만 우물 형태를 갖추고 있다.
또 우짠샘으로 인해 이 마을은 새미골, 샘골이라고도 불린다
우짠샘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아 바다 건넛마을 용잠동에서도 물을 길으러 왔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소식과 소통을 담당했던 공공장소의 역할과 더불어 생포의 생명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새미골의 좁은 이 길은 1940년대 초 포장도로가 나기 전에 장생포와 읍내를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간선도로였다.
장생포 주민들은 이 길을 통해 읍내로 나가거나 고래고기를 팔기도 하였으니 주민들에게는 옛 추억과 역사가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자들은 고래막에서 해체한 고래고기를 지게나 수레에 싣고 운반해 읍내 시장에 팔았고 여자들은 삶은 고래고기를 떼어다 소쿠리에 가득 채워 머리에 이고 보부상처럼 주변 마을이나 역, 시장 등에 가져다 팔았다.

마지막 포경선 선장의 생가이다.
1926년 장생포 출신으로 장생포 대표적인 선장 중 한 명으로 일제말기에 화장, 갑판원으로 고래배를 탔다.
해방 후에는 포항으로 건너갔고 선장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참고래, 밍크고래 등을 잡으며 포경 경험을 쌓았다.
그 후 장생포로 돌아와 최고 호황기의 주역으로 포경이 중단될 때까지 고래배의 선장으로 일했다.

가수 윤수일의 생가가 이 노래비 근처에 있다고 한다.

장생포에는 장생포 옛길 이외에도 고래박물관, 문화마을, 백탑공원, 지관서가 등이 있는 문화창고 등 볼 거리가 많다

한때 장생포에 고래가 들어오면 골목길의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입에 물고 다닌다는 썰이 있을정도의 장생포이다.
이제는 고래산업대신 고래문화가 뜨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오늘 장생포 옛길을 걸으며 건강과 문화를 즐기러 가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