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 명예기자 엄규헌

공업탑은 1962년 당시 울산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명되고, 울산공업센터가 세워지면서 울산의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1967년 건립되었다. 설계와 건축은 부산 서면에 ‘부산탑’이라 불리던 국가재건비를 건립한 경력의 박칠성이 맡았으며, 500만원의 예산은 대한민국 정부와 울산시에서 각각 절반씩 부담했다.

1967년에 건설된 부분은 지금의 하얀 탑과 주변의 동상이며, 화단과 분수대는 10여 년 후인 1974년 완성되었다. 공업탑의 준공식에는 박정희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하였다

공업탑은 산업수도 울산의 상징이다. 공업탑 설치 당시 울산 인구는 50만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군이었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울산이 미비하던 시절부터 현재 광역시가 되기까지 울산의 애환이 담겨있는 소중한 탑이다. 제1차 경제개발 지역으로 울산이 선정이 되어 종합제철공장·비료공장·정유공장 및 기타 관련 산업들이 울산에 우후죽순으로 건설되었고 온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청량면의 두왕리, 범서면의 무거리·다운리 및 농소면의 화봉리·송정리가 울산공업지구 울산이 광역시가 되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공업탑은 단순 기념비적인 상징물이 아니라 울산의 총체라고 얘기할 수 있다. 울산광역시가 된 지금과 당시의 울산시와 비교하면 가히 격세지감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울산 역사의 산증인이라 말할 수 있는 공업탑에 우리는 단순 교통체증의 원인이라 보고 오히려 욕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 무관심으로 일관할 때도 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지금 울산이 광역시가 되어 잘나가고 있지만 당시에 피땀 어린 눈물들이 없었다면이렇게까지 성장을 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우린 그때를 잊지 말아야하며 항상 감사함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

끝으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치사문으로 마친다.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치사문

사천 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 공업 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을 재현하려는 이 민족적 욕구를 이곳 울산에서 재현하려는 것이니, 이것은 민족 재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고,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는 것이며,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제2차 산업의 우렁찬 건설의 수레소리가 동해를 진동하고 공업생산의 검은 연기가 대기 속에 뻗어나가는 그날엔, 국가와 민족의 희망과 발전이 눈앞에 도래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빈곤에 허덕이는 겨레 여러분, 5·16 혁명의 진의는 어떤 정권에 대한 야욕이나 정체의 변조에도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오로지 이 겨레로부터 빈곤을 구축하고 자손만대를 위한 영원한 민족적 번영과 복지를 마련할 경제재건을 성취하여야 되겠다는 숭고한 사명감에서 궐기했던 것입니다. 이 울산 공업도시의 건설이야말로 혁명정부의 총력을 다할 상징적 웅도이며 그 성패는 민족 빈부의 판가름이 될 것이니, 온 국민은 새로운 각성과 분발 그리고 협동으로서 이 세기적 과업의 성공적 완수를 위하여 분기 노력해 주시기 바라마지 않습니다.

— 1962년 2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육군 대장 박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