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구명예기자 윤경숙

 

언젠가 TV에서 학춤을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별관심이 없어 그냥 기억속에 묻어 두었다.

2019년 12월, 필자는 철새홍보관 생태해설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김성수박사(철새홍보관관장)를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필자는 학춤에 대해 아는바가 없었기에 김성수박사와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김성수박사와 약 7개월 간 철새홍보관에서 근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춤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김성수박사와 수 십 차례 茶談을 나누면서 ‘울산학춤’의 탄생과정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울산학춤이 만들어진 과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성수박사는 1997년, 신라 효공왕 5년(901) 생성된 ‘계변천신(戒邊天神)’ 설화를 바탕으로 ‘울산학춤’을 만들게 되었다.

한국학춤 연구는 궁중학무에서 시작했고, 최초의 탈 학춤인 궁중학무에 등장하는 청학과 백학 또는 청학과 황학 그리고 연꽃 속에서 나오는 동자 등을 동기로 하여 전적을 찾고, 성경린(1911~2008)을 찾아가 연구를 이어갔다.

궁중학무에 이어 민속학춤도 연구를 했다. 민속학춤은 궁중학무의 탈학춤과 달리 학춤의 무복을 양반의 도포(道袍)를 빌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 승려의 법복인

장삼(長衫)과 비교하여 민속학춤의 생성 배경과 전파 경로와 변천을 연구했다.

한국 학춤의 바탕은 불교이며, 춤의 대상은 학(두루미)이고, 생성 주체는 승려이며, 의복은 장삼에 바탕을 두었다.

또한 궁중학무의 대상은 계변천신설화에 등장하는 쌍학이 바탕이며, 그 후 사찰학춤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로 사찰학춤에서 양산학춤이 파생되었고, 다시 동래학춤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 김박사의 잠정적 결론이다.

김성수박사가 학춤에 이토록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여쭈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여름성경학교 연극에서 토끼 역을 맡아 춤을 추게 된 것이 춤과의 첫 인연이었고, 춤에 대한 끼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증조부와 선친께서 양산학춤을 추셨기 때문에 늘 학춤을 보고 자랐습니다.

선친 김덕명(1924~2015.10.24)은 한량무(경상남도지정무형문화제 제3호) 보유자이자 양산학춤 계승자이며, 아버지는 평양 예기였던 김농주를 양누이 삼아 13세부터 양산 권번에 드나들며 민속춤(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을 배웠습니다.”

김성수박사의 유년시절은 학춤과 사랑에 빠져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춤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었다.

 

茶談을 나눌 때면 김박사는 鶴의 언어로 鶴의 몸짓으로 대화를 했다.

울산학춤의 춤동작인 ‘학의 날개 펴기, 기재개 켜기, 한 다리로 서기, 걷기, 먹이 먹기, 날기, 잠자기, 깃 고르기 등 다양한 행동이 몸짓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하늘을 나는 듯한 걸음걸이와 손동작, 그윽한 눈빛은 먼 미래를 날고 있는 한 마리의 鶴처럼 보였다.

4월 어느날, 드디어 김성수박사의 학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울산학춤은 하늘에서 동작과 땅에서 동작 크게 두 가지 동작으로 구분한다.

-하늘에서 동작 : 다시 날기, 내려앉기, 빠르게 돌기

-땅에서 동작 : 먹이 쪼기, 깃고르기, 잠자기, 사랑하기, 경계하기, 위엄주기, 날개펴기

검은 갓을 쓰고, 장광수를 입고, 흑혜를 신은 김성수박사는 사람이 아닌 한 마리의 학 그자체였다.

사뿐사뿐 걷는가 싶더니 어느새 장삼을 휘날리며 날고, 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잽싸게 먹이를 쪼고, 먹이를 쪼는가 싶더니 어느새 누부시게 사랑을 나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춤사위에 두 손은 손바닥이 아플 정도로 박수를 쳤고, 입에서는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학을 사랑해 학춤을 추게 된 김성수박사님께 무한한 박수와 격려를 보냈다.

 

김성수박사님은 태화강에서 다시 학의 나래를 보며 학과 함께 학춤을 추는 그날이 왔으면 한다고 전했다.

 

울산에서 학춤을 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울산에 학이 나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