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2동은 울산 남구의 ‘신정동 5형제’ 중 가장 넓고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신정동의 대표 주자다. 1977년 신정동이 1,2동으로 분동된 이래 신정1동과 더불어 5개 동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신정2동은 공업탑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공업탑에서 뻗어나가는 울산의 대표적 간선도로 다섯 개 중 문수로 삼산로 봉월로 두왕로가 모두 신정2동을 지나간다. 지금은 신정4동에 속하는 수암로 구간 역시 신정2동에서 갈라져 나간 곳이므로 울산의 상징인 공업탑은 명실상부 신정2동의 대표적 랜드마크다.

공업탑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린 5년 후인 1967년 기공식을 기념하는 조형물로 현재의 자리에 들어섰다. 당시 지금의 로터리 지역은 신흥 공업도시 중심지로서의 활기가 넘쳤다. 아침이면 시내 곳곳의 공사장과 작업장으로 가는 일꾼을 태운 차량들이 여기서 출발했고, 저녁이면 산업역군들이 지친 발걸음을 내려놓는 곳도 공업탑 주변이었다. 전국에서 울산으로 공업관광을 오는 사람들도 이곳에서 관광버스에 오르고 내렸다. 이곳에는 중견 기업들의 사택단지 자리였던 곳이 많고, 아직도 몇 개가 남아 당시의 흔적을 말해 준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만들어지고 건물과 주택이 들어서며 도시 모습이 갖춰졌다. 공업화로부터 시작된 울산의 근대 역사가 신정2동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원다방, 희락복국 등 아직도 울산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이 근처의 유명 업소들은 중요한 이정표의 역할을 겸했다. 지금도 울산의 많은 버스 노선이 공업탑을 지나간다.

 

탄생 당시부터 사람을 끌어들였던 공업탑 근처에는 유난히 중·고교가 밀집되어 울산의 젊은 인재를 키워내는 요람으로서의 이미지도 갖고 있다. 울산의 대표적 명문학교로 꼽히는 전통의 학성고교가 공업탑 건립 직후 개교한 것을 비롯해서 울산여고, 신정고, 학성중, 서여중이 신정2동에 터를 잡았고 울산 청소년들이 꿈과 끼를 키우는 공업탑 청소년 문화의집도 근처에 있다. 두왕로변 울산여상도 공업탑에서 가깝다.

북쪽 경계는 남산자락이고 동의 남쪽 절반 정도를 울산대공원이 차지하고 있어 지금은 신정2동이 울산 근대역사 ‘발상지’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친환경 주거지역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서쪽의 두왕로에서 시작되는 울산대공원이 자연 지형을 최대한 살려서 만들어진 덕분에 예전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 마을터와 골짜기 산등성이 구릉 등의 형태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나발고개, 너드렛골, 논골, 새골, 막골, 방각골, 부채골, 상골, 윗골, 아랫골 춘산곳, 피밧골 등의 이름도 정다운 골짜기의 흔적과 활고개, 화리고개 등 제법 높은 등성이의 지형도 그대로 있어 아기자기한 대공원의 산등성이를 이룬다. 많은 곳이 이름만 남아있지만 활을 닯았다고 해서 활고개 혹은 궁현령으로 불렸던 옛날 고개는 두왕로의 활고개교차로라는 이름을 남겼고, 인근에 문수궁도장까지 만들어져서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다. 남부경찰서와 울산여고 자리에도 깊은 골짜기와 큰 못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 이종하 선생의 기부로 건립돼 40여년간 울산의 각종 실내 스포츠 경기와 행사가 열리다가 지금은 철거된 종하체육관도 신정2동 북쪽의 청솔공원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는 이종하 선생의 아들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선친의 뜻을 이어 출연한 건축비로 새 체육관을 만드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종하체육관 주위로는 이 선생의 이름을 따 종하거리로 명명된 길이 있고, 종하거리 인근에는 젊은 감각에 맞는 음식점과 카페 등이 밀집한 공리단길이 있다. 해마다 제야에 울리는 대공원의 ‘울산대종’의 소재지도 신정2동이다.

신정2동은 북쪽은 거마로를 경계로 신정1동과 마주보며 동남쪽의 많은 부분은 옥동과, 서쪽은 신정3,4동과 각각 닿은 두툼한 열십자 모양으로 생겼다. 여천천 상류 미복개 구간인 작은 개울이 상여천천이라는 이름으로 울산대공원과 아파트 단지의 경계를 흘러 동쪽으로 간다. 예전 사택 단지였거나 낡은 주택가의 재개발이 많이 이루어졌고, 곳곳이 재개발 예정지로 되어 있어 시간이 갈수록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특색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면적 2.71㎢, 인구 2만4000여명으로 면적과 인구 모두 남구 14개 동 중 여섯 번째다. 1982년 신정4동을 떼어 준 뒤 오늘에 이른다.